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디 아민 (문단 편집) === [[쿠데타]]로 집권하다 === 1971년 1월 25일, (자신의 은인이나 다를 바 없는) 밀턴 오보테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아민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. 한참 [[냉전]] 시절이라 서구 국가들은 우간다의 좌파 정권을 무너뜨린 이 쿠데타를 환영했다.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. 당시 미국은 좌파 성향 정권을 접수하고 우파 정권을 세우면 독재자일지라도 인정해줬는데 그도 그랬다.[* 그러나 이디 아민은 인종 역차별을 제외하면 딱히 우파적이라고 부를 만한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역으로 오보테 시기처럼 반서방에 가까운 모습이었다.] 쿠데타 후 우간다의 수도인 [[캄팔라]]에서는 의회 건물은 물론이고, 공항의 활주로에까지 가시 철조망이 둘러쳐졌고, 공항 중앙 대기실에서 의문의 폭발로 이곳에 있던 [[가톨릭]] 사제 4명 중 2명이 사망하게 되면서 후에 일어날 억압적인 통치를 암시했다. 게다가 우간다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실상 호텔에 감금되었다. 아민은 쿠데타 직후에 처음으로 한 연설에서 "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에 불과하며, 상황이 정상화될 때까지 군사 정권은 임시 정부로만 남을 것이다"라고 말했고,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이며, '국가를 [[민주주의]]로 되돌리기 위해' 1973년 3월에 민선을 치르고 5년 뒤에 물러날 것을 약속했다. 아민은 쿠데타 후에는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, 사진을 찍고, 서민들과 함께 전통 춤을 추기도 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감췄고, 우간다의 전 식민 통치자들을 조롱했으며, 우간다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오보테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[[영국]]에서 쓸쓸히 죽은 에드워드 무테사 2세(Edward Mutesa II, 1924~1969)의 시신을 우간다로 봉환하기도 했다.[* 참고로 아민은 오보테와 무테사가 권력 투쟁을 했을 때에 오보테의 지시를 받고 무테사의 궁전을 포위 공격하여 불태운 전적이 있다.] 아민이 몰아낸 오보테는 야당 활동을 금지하고 비상 사태를 명분으로 정적들을 재판 없이 감금하고 고문한 독재자였으나, 아민은 '자비롭게' 오보테가 감금한 정치범들을 석방했기 때문에 집권 직후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. 쿠데타 직후에는 우간다의 국민들이 쿠데타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밖으로 뛰쳐나와 춤을 췄고, 오보테의 포스터를 갈기갈기 찢거나 발로 짓밟았으며, 영국의 관찰자는 "나는 아민 장군보다 더 인정이 많고 인기가 있는 지도자는 보지 못했다."라고까지 평할 정도였다. 그러나 오보테가 아민에 비교하면 매우 선량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